우리 심판들은 경기가 있는 날, 하루에도 몇 번씩 외부자극에 의해 상처를 받는다. 특히 심판이 내린 판정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는 지도자나 선수들을 대하게 될 때 상처를 받는다.

정당한 불만제기는 심판이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숙명이지만, 심판으로서 최선의 판정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판정들에까지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며 화를 내는 지도자나 선수들에게는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심판은 자신의 판정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견지하고, 조심하며 오만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판정에 대해 무조건 화부터 내고 보는 지도자나 선수들을 대하게 될 때면, 심판들도 상처 받고, 그리고 그 상처는 결국 또 다른 화가 된다. 이렇게 생긴 화는 또 다른 이의 화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결국 화는 끝도 없이 악순환 된다. 서로 격려하고 위해주어도 부족한 시간에 우리는 서로에게 적잖은 상처와 분노를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들은 대부분 코트에서 표현을 잘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 만을 최우선으로 한 채 표현하기 때문에 코트는 상처와 분노로 가득차게 된다. 무례한 태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 무책임하거나 부당한 발언 등 이상한 계산법으로 서로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사건들이 코트 안에 무성하기 때문에 우린 앞서 말했던 화의 악순환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인간이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이 화라고 한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상대를 죽이고 싶으면 백까지 세라.’ 라는 글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화를 다스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반대로 그만큼 화를 꼭 다스려야한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심판과 심판 만이 동료가 아니다. 코트 안엔 수많은 동료들이 있다. 지도자와 심판, 지도자와 선수, 선수와 선수, 심판과 선수. 모두 태권도계에 몸을 담고 있는 동료들이다. ‘동료를 미워하지 말라. 그 순간부터 판단력이 흐려질 것이다.’
 
이는 30년이 넘도록 심판의 삶을 살고 있는 필자가 절실히 느끼는 교훈이다. 화, 분노라는 감정이 심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감정인지 필자는 잘 알고 있다. 경기장에서 가장 명확한 판단력을 가져야할 심판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심판이 동료 심판에게 화를 갖게 되면, 동료로 그를 신뢰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경기 판정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심판이 지도자나 선수에게 화를 갖게 되면 판정의 객관성을 갖고 판단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경기 판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우리 심판들은 특히 경기장에서 누군가에게 화를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심리학에 수면제 효과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같은 정보가 일정한 간격으로 다시 발생되지 않는다면 앞에 들어온 정보는 잠든다는 것이다. 화가 날 때는 이것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화가 나는 대상이 있다고 자꾸 그 화를 되새기며 생각하면, 그 화는 지워지질 않는다. 화가 날 때는 잠깐동안이라도 시간의 공백을 두어 열을 식히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마치 수면제를 먹이듯 마음 속 화를 잠재우는 방법이 될 것이다. 무조건 남을 위해서 화를 다스리라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감정만으로 가득차도 모자란 마음이, 화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좀 억울해지지 않는가. 우리의 마음이 건강할 수 있도록, 화라는 감정에 수면제를 먹이자.
 
- 상임심판 엄영섭
저작권자 © WTN 월드태권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