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영배라는 신기한 잔이 있다. ‘넘치고 지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속뜻이 있는 잔이다. 이 잔이 신기한 이유는 잔 밑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이나 술을 부어도 잔이 전혀 새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잔의 70% 이상이 되도록 물이나 술을 부으면 그땐 그 밑구멍으로 모두 쏟아져 내려버린다. 이래서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제나라의 환공은 이 잔을 항상 곁에 두고 보며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했고, 공자 역시 이를 본받아 계영배를 항상 곁에 두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 계영배를 통해 항상 겸손함을 갖고자 했던 것이다.

  명심보감에 이런 구절이 있다. “복이 있다 해서 다 누리지 말라. 복이 다하면 몸이 빈궁에 처하게 된다. 권세가 있다 해서 그것을 부리지 말라. 권세가 다하면 원수를 만나게 된다.” 복이 있을 때 아끼고, 권세가 있을 때 오히려 더 공손하고 겸손해지라는 것이다.

  벌써 수십년도 지난 드라마 한편이 생각난다. <완장>이라는 단편 드라마였다. 한 시골 청년이 어느 날부터 마을 저수지 관리인이 되어 ‘관리’라고 쓴 완장을 차게 되며 겪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정말 저수지를 잘 지키려는 의도로 사람들에게 완장 낀 팔을 내밀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몰래 낚시를 하려는 청탁도 들어오고, 저수지 근처의 나무를 베려고 슬쩍 쥐어주는 돈도 받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완장이 주는 권력에 빠져 온갖 횡포를 부리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그저 저수지를 잘 지키는 정도였는데, 그 작은 힘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안하무인 권력을 남용하게된 것이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드라마가 아직 잊혀지지않는 것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인간사와도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태권도 판에서도 우린 이와 같은 수많은 완장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세치 혀로, 얄팍한 직위로, 때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둔갑되는 완장들을 만난다. 경기장에 서는 지도자, 선수, 심판 모두가 그렇다. 자신이 가진 작은 완장에 눈이 가려져 남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완장을 내려놓고 생각하면 상대의 입장과 처지가 다 보일 텐데, 그 뻔한 사실을 참 잘도 잊어버리고, 완장의 힘이 눈을 가린다. 완장을 가졌다고 겸손을 잊는 것이다. “인생은 되돌려 줄 때 완성된다.”는 전설적인 골퍼 게리 플레이어의 말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하며 이해해줄 때, 비로소 내 삶이 더욱 의미 깊어진다는 것을.

  남을 탓하기 전에 나부터, 우리부터 변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겠다. 내적으로는 더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마음을 갖고, 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오심율을 줄여야한다. 필자는 지난번 상임심판 교육 때 보여준 2014년 심판들의 오심율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있기가 창피했다. 아무리 시범적으로 실시했고 재미로 본 것이더라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지 말고, 심판의 본질인 공정하고 정확한 판정을 위해 보다 노력해야할 것이다.

  모르면서 아는 체 하거나 일부러 알면서 모르는 체 가장하는 모습은 촌스럽기 그지없다. 반면 누구에게나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코치나 감독이 오해하고, 소리를 높이는데도 성실히 설명하여 화를 누그러뜨려주고, 어떤 경우에나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은 참으로 근사하지 않은가? 그러한 배려와 여유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따뜻함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무주 태권도원에서 2015년 상임심판교육이 있었다. 2년여 간의 공백 끝에 돌아온 윤웅석 의장은 작심한 듯 일갈하였다. “놀고 먹을 생각하지마라. 부의장 5명, 심판, 영상판독까지 모든 임원들은 자기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한다.” 의무와 권한은 주는 대신 책임도 묻겠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자유가 보장된 만큼 우리 스스로 방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겸손이란 지극히 당연한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하는 것.”

항상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말고, 또 과신하지도 말고 능력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외적으론 상대를 존중하며 다독일 수 있어야할 것이다.

                                                                                                                                                              상임심판 엄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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