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일본의 석탄 회사의 예를 들면서 태권도의 미래에 대해서 개인적인 걱정

 
 
태권도학의 체계에 대한 공청회를 마치고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일본의 석탄 회사의 예를 들면서 태권도의 미래에 대해서 개인적인 걱정을 해 보았다.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으면 어떤 힘 있는 기업이나 단체, 개인이라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시대의 흐름은 지식사회로의 전환이며, 따라서 태권도 역시 지식화 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태권도진흥재단 주최로 열린 ‘태권도학의 체계정립 및 태권도 아카데미 교육과정 개발’이라는 주제의 연구는 이런 시대의 흐름을 잘 읽은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시도의 근저에는 단순히 땀 흘리며 신체운동만을 한 태권도계의 지도자가 아니라 연구와 지식생산을 해 본 지도자의 역량이 뒷받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일 공청회에서 많이 제기된 여러 비판점들을 살펴볼 때 태권도인들의 상당수는 이와 같은 수준을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태권도학의 체계 정립에 대한 비판점에서 특별히 분명하게 드러났다. 태권도학의 체계가 학문의 본질인 학적 물음에 기초해서 제시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몇몇 태권도인들이 현실의 요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는 점이 이것을 대변한다. 어떤 태권도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권도 현장 지도자들인 태권도 도장 사범님들은 당일 제시된 태권도학의 체계와는 다른 내용들을 원한다고. 그런 현실적인 요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태권도학의 체계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하지만 태권도학의 체계에 대한 요구가 왜 생겨났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런 비판점은 상당히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 된다. 태권도학의 체계 정립에 대한 요구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필자가 아는 바로도 태권도학과 교수들이나 대학원생 이상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략 10년 이상 전부터 지적되어 왔던 문제점이다. 즉 태권도학의 체계가 너무 부실하거나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자. “태권도인들이 서 있는 지금 여기가 춥다”라고. 지금 여기가 춥다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따뜻한 곳은 추운 곳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누군가가 따뜻한 곳을 찾아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려 준다. 이 때 태권도인들이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즉 “거기는 너무 멀다. 우리는 가까운 곳을 원한다.”“현재 태권도학 체계에 대한 문제점은 ‘그저 현실의 요구만을 수용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태권도학의 체계가 현실의 요구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비판은 바로 이와 같다. 현재 태권도학의 체계에 대한 문제점이 왜 노정되었겠는가? 그것은 ‘그저 현실의 요구만을 수용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권도학의 과목들은 단편화 되어 있고 서로 연관되지 못했다. 즉 체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 문제점을 해결한다면, 즉 그런 추위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 곳으로 이동하듯이 지금의 상태에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다. 즉 단순히 현실의 요구만을 수용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립된 태권도학의 체계가 현실적 요구에서 다소 멀다는 비판은 추운 곳에 서서 따뜻한 곳이 너무 멀다는 비판처럼 우둔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한 태권도학의 체계는 사실 별로 현실적 요구들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여러 현실적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인 학문의 체계를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다른 발전된 학문과 같은 높은 수준의 추상성과 난이도를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요구를 수용할 수 있으면서도 초점은 다소 다른 곳에 주어진다. 이제 비판자들의 잘못된 비판은 이런 내용을 충분히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당일 공청회에 와서 한 눈으로 흘낏 본 바만을 가지고 지레짐작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겨난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 아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 진정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식함이 드러나는 것을 겁낸다. 발표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 비판하는 문제점의 일차적인 책임은 그런 것을 잘 전달하지 못한 발표자의 책임도 큼은 틀림없다. 하지만 상세한 것, 제시된 자료집에 있는 내용도 확인하지 않은 비판 역시 잘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말하는 우를 범하는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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