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오심이나 판정의 번복 등은 경기의 일부일 수 있다. 하지만 심판은 가능한 이런 실수를 하면 최소화해야 한다. 심판은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간혹 보면 경기를 지나치게 지루하게 방관하는 심판이 있다. 심판이 너무 심하게 ‘갈려’ 선언을 해서도 안 되겠지만, 붙들고 늘어지는 선수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안 된다.

심판은 적재적소에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만들되, 선수들이 더욱 파이팅 넘치는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한다. 심판도 인간이다. 그래서 흥분도 하고, 경기를 감정적으로 이끌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히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2009년 한해에도 경기장에서 심판들의 수많은 오심과 실수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졌다. 태권도 경기는 순식간에 벌어지는 득점에 연속이기 때문에 심판의 눈으로 따라잡기가 쉽지만은 않다. 특히 지금의 강도감지호구는 심판의 자세를 잠시라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여러모로 심판에겐, 쉬운 경기란 없다.

# 장면1 : 2007년 11월 6일부터 강원도 태백에서 협회장기 겸 국가대표 선발예선전이 열렸다. A선수와 B선수의 준결승. 여기에서 승리하는 선수 중 한명은 2010 국가대표 최종전에 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경기였다. 그래서 두 선수의 긴장감은 경기장을 압박하고도 남았다.

1회전, 두 선수는 서로 탐색전 끝에 1:1로 경기를 마쳤다. 2회전엔 긴장감도 점차 해소되고, 탐색전도 충분히 끝냈기 때문에 열띤 공방전이 벌어졌고 A선수가 2점을 앞서며 2회전을 마무리했다. 앞서고 있는 A선수 쪽 세컨석은 웃음을 보이며 여유로워보였다. 마치 국가대표 선발 최종전 티켓을 손에 쥔 것처럼. 하지만 3회전이 시작되고 상황은 달라졌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B선수가 경기를 11:8, 삼 점차로 앞서게 된 것이다. 분위기는 점점 B선수 쪽으로 흐르는 듯 했다.

그러나 이때 A선수가 얼굴공격을 성공 시킨 후 거의 동시에 몸통돌려차기 공격을 성공시켜 전광판은 이 몸통돌려차기 공격에 대한 강도를 ‘바‘가 확인시켜주고 있었고, 부심들의 채점기에 진동이 와 득점이 들어간 것을 알려주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공격때문에 심판들은 A선수의 몸통돌려차기 공격을 놓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광판을 보고 심판들은 즉시 합의하여, 미쳐 그냥 지나칠뻔한 득점을 인정해주었고, 결국 11:11 동점 상황에서 들어간 써든데스에서 A선수가 단발돌려차기를 성공시키며 경기를 가져갔다.

결국 최종 승자가 되긴 했지만, ‘강도감지호구’가 아니면 자칫 경기를 놓칠 뻔한 A선수였다. ‘강도감지호구’가 있었기에 승리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경기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경기였다. 심판은 언제나 긴장하여야 한다.

# 장면2 : 협회장기 대회 6일째. 우리 조는 5일내내 대학, 일반, 고등부 경기에 심판을 보아야 했다. 심판들 간에는 우스갯소리로 중등부 코트에 들어가는 걸 휴가간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중등부경기가 만만하다거나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다른 경기들이, 중등부 경기에 비해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5일 내내 긴장감이 더하는 코트에만 들어가 있으니, 불만 아닌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회 마지막 날, 화려한 휴가를 받았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경기에 들어서자마자 사고는 터졌다. 1회전 청선수는 홍선수를 쉽게 이길 것 같았다. 청선수의 얼굴공격과 몸통공격으로 스코어는 3:0. 2회전 쯤되면 DSC로 경기가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역시 예상했던 것과 같이 2회전이 시작되자 청선수의 무차별 공격이 이어졌고, 홍선수는 한계선 밖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에 심판은 ‘갈려’를 선언했지만 이미 흥분한 청선수의 얼굴공격이 이어져 결국 이 공격으로 인해 홍선수의 코가 주저앉는 사고가 터졌다. 즉시 심판은 경기를 중단하고, 청선수의 갈려 후 공격으로 인해 홍선수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이처럼 심판에겐 쉬운 경기란 없다. 휴가(?)라고 생각했던 경기들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항상 모든 경기에 집중하여야해야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을 수 있는 경기였다. 심판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경기에 임했다면, 어린 선수의 코가 주저앉는 그런 불상사는 사전에 예방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화려한 휴가”란 없었다.

경인년 새해, 남한산성에 올랐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기도 전에 찾아온 또 한 번의 눈이 겹겹이 쌓여 계곡마다 하얀 눈빛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눈이 많이 내리게 되면 춥고 배고픈 건 사람만이 아니다. 산짐승, 산새들에게도 정말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고라니의 것인지, 산토끼의 것인지도 모를 발자국들이 참 어지럽게도 찍혀있다. 산짐승들도 먹이를 찾아 이산저산을 헤매나 보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나 스스로를 옥죄어 본다. 우리 상임심판 모두 지난해에 새긴 발자국을 되짚어보며 과오는 하얀 눈밭에 묻어버리고 새롭게 2010년의 발자국을 새기며 새해를 맞이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대한태권도협회 상임심판 / 엄 영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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